좋은글과시

A+ 마음 (장영희 에세이중에서)

설악산 2011. 7. 9. 10:35
728x90

 

 

 

학기말이 다가올 때마다 선생으로서 겪어야 하는 고민 중 하나가

학생들에게 학점을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어차피 학생들 실력이라는 것이 도토리 키재기인데다가,

문학점.언어적 소양을 몇 등급의 우열로 나눈 다는 것 자체가 참으로 어려운 일이다.
게다가 쓸데없는 상상력만 풍부한 나인지라 학교에서 주는 비율대로 학점을 계산할 때마다

간혹 A나 B, B나 C의 경계선상에 있는 학생들을 두고 많은 고민을 한다.
A학점을 주기에는 총점이 2점 모자라지만 착하고 노력을 많이 하는 학생인데,

혹시 이 학생이 '청년 가장'은 아닐까? 아버지가 IMF로 인해 실직하고 어머니는 병들어 누워 있어

집안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다면? 내가 주는 학점 때문에 간발의 차이로 장학금을 받지 못한다면?

그래서 다음 학기 등록을 못한다면? 상상에 상상을 거듭하다 보면

끝내 결정을 내리지 못하고 시간을 질질 끄는 경우가 많다.
그나마 문학 과목에서는 소설책을 제대로 읽었는가, 페이퍼를 논리 있게 잘 썼는가 등의 어느 정도
객관적인 평가 기준이 있어도, 회화 과목은 그렇지 못하다.
그래서 나는 가끔 학생들의 발음을 교정하고 또 점수를 줄 기준을 확보하기 위해 학기초에 학생들이
자주 범하는 발음 오류 몇 개를 지적하고 학기말까지 제대로 발음하지 못하면 점수를 많이 깎고.
아무리 필기 시험을 잘 봐도 A를 주지 않겠다고 으름장을 놓는다.

요새는 대부분의 학생들이 영어를 유창하게 하지만, 그래도 p/f, r/l, see/she등의 발음은 여전히 어려워한다.

 학기 내내 연습시키면 어느 정도 교정되는 학생들이 있는가 하면, 워낙 고질적 버릇이라 고쳐지지 않는 학생들도 있다.

이번 학기에 내 수업을 들은 병진이는 후자에 속해서, 본인이 무척 노력함에도 불구하고 발음 교정이
쉽지 않았다. 워낙 성실하고 똑똑한 학생인지라 필기 시험에서는 항상 좋은 성적을 냈지만, 중학교 때
부터 잘못 배운 발음을 이제 와서 고친다는 것은 좀 힘들어 보였다.
학기말 성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는 필기 시험도 썩 잘 봐서 수강생 중 2등을 했지만,

 구두 시험에서는 p와f를 완전히 반대로 발음하는 바람에 거의 알아듣기 힘들 정도였다.
그래서 어제 병진이의 성적을 매기며 B+와 A-사이를 왔다갔다 망설이다가 마침내 포기하고
성적기록부를 연구실 책상 위에 두고 나왔다.

 

내가 병진이의 점수를 확정한 것은 오늘 아침 출근길, 신촌 로터리에서였다,

대형 백화점 앞 횡단 보도 근처에서 신호등이 바뀌기 기다리다가, 차창 밖으로 한 노인을 보게 되었다.

어림잡아도 여든은 되어 보이는, 몸집이 아주 작고 깡마른 그 노인은 추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지하철역 입구에서 골판지 조각 위에 웅크리고 앉아 나무 부채 몇 개와 여자용 스카프를 팔고 있었다.
부채와 스카프, 겨울 품목으로는 이상한 선택이었지만, 아마도 노인의 앙상하고 쇠약한 몸으로 운반
할 수 있는 물건들은 그것뿐이었는지 모른다. 지하철역 입구에서는 많은 사람들이 나오고 있었지만
누구 하나 노인에게 눈길을 주는 이가 없었다.
노인도 팔겠다는 의지를 잃은 듯, 추위에 몸을 동그랗게 구부린 채 멍하니 지나는 사람들의 발만 보고 있었다.
그러나 나는 곧 한 젊은이의 시선이 노인에게 계속 쏠리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바로 병진이였다.
병진이는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며 노인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러다가 다른 사람들이 길을 건너기 시작하자, 잠깐 망설이는 듯하더니 이내 몸을 돌려 노인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물건들은 잠깐 살펴보다가 부채 두 개를 집어 들었다. 병진이를 쳐다보는 노인의
눈에 갑자기 생기가 돌며 얼굴에 미소가 흘렀다.
만난 지 겨우 한 학기밖에 안 됐지만 병진이를 알고 있는 나는 그가 한 겨울에 부채가 필요해서가
아니라 추위에 떨고 있는 그 노인이 불쌍해서, 차마 그냥 갈 수가 없어 부채를 샀다는 것을 안다.
학교에 도착해 책상 앞에 앉았을 때 나는 어제 빈 칸으로 남기고 간 병진이의 성적란을 메울 준비가
되어 있었다. 조금도 망설임 없이 나는 A라고 선명하게 써 넣었다.

 

까짓, 영어의 p와 f발음쯤 좀 혼동하면 어떤가. 영어는 기껏해야 지구상의 3분의 1정도 인구가

알아듣는 말이지만, 불쌍한 노인을 보고 측은하게 느끼고 도와주는 마음, 남을 배려하는 마음이야말로
A+마음 아닌가. 그 마음은 이 지구상의 모든 인간들이- 아프리카의 피그미족도,북극의 에스키모족
도-알아듣는 만국 공통어이다.
한마디 입 밖에 내지 않아도 마음에서 마음으로 전달되는 아주 효율 적인 말이고,

 학원이나 대학에 가지 않고도 우리가 태어날 때부터 잘 알고 있는 언어이다.
누가 학문적인 자질 외의 다른 근거로 병진이에게 좋은 점수를 주었다고 비난한다면 나는 할말이
없다. 그러나 내가 가르친 적이 없는, 아니 가르칠 자격이 없는 만국 공통어를 그렇게 능숙하게

구사한 병진이에게 A보다 더 좋은 학점이 있다면 그거라도 주고 싶은 심정이다.
영어 발음 제대로 하는 A+지성을 가르치는 것도 중요하지만, 보다 더 편리하고 효율적인 언어,
A+ 마음도 가르쳐야 하는 것이 선생의 본분일 텐데, 병진이는 선생인 나보다 훨씬 더 뛰어난 실력을 갖추고 있지 않은가.
벌써 12월, 이제 곧 성탄절이 온다.

병진이의 본을 따라 나도 오랫동안 잊고 있던 만국 공통어를 되살려야겠다.